
어릴 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가족이니까, 부모님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미안하다는 말 없이도, 다 알아주겠지. 그렇게 믿었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깨닫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언젠가 그 말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분이었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하셨다.
어릴 땐 그런 아버지가 어색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나에겐 “사랑한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 생신이 다가오면 카카오톡에 “생일 축하해요”라고 딱 한 줄 쓰고, 그 밑에는 감정 없는 이모티콘 하나.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넘겨버리고, 괜히 ‘다음엔 꼭 말해야지’ 다짐만 쌓여갔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하셨다.
“아빠는 네가 전화 안 하면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봐.”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버지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건 쑥스러워서이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었구나.
그걸 진작 알았는데도, 나는 왜 한 번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지”라는 말은,
사실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하는 말이다.
내 마음, 내 후회, 내 감정의 모서리들이 거기 다 담겨 있다.
우리는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제일 나중으로 미룰까.
혹시 그 말이 가진 무게가 너무 커서일까.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같은 말은
단어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꺼내는 순간 내가 너무 벌거벗겨지는 것 같기 때문일지도.
그 말을 꺼내지 못했던 나날들이 쌓이고,
어느 날은 그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입술이, 목소리가, 마음이 너무 굳어버려서
결국 또 아무 말도 못한 채 돌아서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낯설다면
차라리 익숙한 말로 시작해도 괜찮다.
“밥은 드셨어요?”, “괜찮아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 평범한 말들 안에도
우리의 마음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결국 언젠가는
진짜 마음을 담은 말을 해야만 한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때.
‘알겠지’라는 마음이 아니라
‘알려줘야지’라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김이나 작가의 『보통의 언어들』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내가 하고 싶지만 못했던 말들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김이나는 말한다.
상처를 주는 말은 모두 뾰족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가 되는 말들도 있다.
나는 이 말에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꼭 공격적인 말 때문만이 아니구나.
내가 하지 않은 말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구나.
『보통의 언어들』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너무나도 보통이라서
오히려 더 깊게, 더 진하게 다가온다.
가족과의 대화, 친구와의 다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오해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하지 못한 말’들 속에 사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그 말을 듣지 못해 서운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말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작사가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 상처를 어루만지는 문장들
상처를 어루만지는 문장들김이나 '보통의 언어들'누구보다 많은 ‘단어’를 다뤄온 사람,수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만든 작사가 김이나.그녀가 작사가가 아닌 ‘사람’으로,그리고 누군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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